[허진이프로젝트] #4. 애써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

안녕하세요.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허진이’입니다. 보육원 퇴소 이후, 저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받았던 진심이 담긴 말과 따뜻한 관심을 저와 같은 친구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허진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보호종료 당사자인 청년들과 함께 아동양육시설 아동들을 대상으로 자립 강연을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요. 본 프로젝트를 통해 강연 당사자들도 보육원에서의 삶과 현재의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 삶과 관점을 담은 에세이를 전해드리려 해요. 평범한, 보통의 청춘들의 삶이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 시작합니다.

무슨 옷을 입을까?

이번 프로젝트 모임을 앞두고 일주일 전부터 수시로 옷 방에 들어갔다. 윗옷, 아래옷 하나씩 조합해보며 입고 갈 옷에 대해 고민했다. 사소한 것에 의미를 담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무슨 옷을 입을까?”라는 질문으로 타인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르는 기준은 그날의 분위기를 포함해 내가 가져야 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색일 수도, 그날을 기대하는 나의 기분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그날 입게 된 옷은 나의 기분, 나의 마음가짐이 담긴 옷이다. 

오늘은 내가 가장 자주 입는 세미정장 스타일의 옷을 골라 입었다. 오늘 준비된 프로그램이 멤버들과 함께하는 <인생 그래프>이기 때문이었다. <인생 그래프>는 각자의 인생에서 좋고, 슬펐던 사건을 그래프를 활용해 그려보고, 그린 내용을 이야기 해보는 활동이다. 멤버들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랐다. 멤버들은 그동안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어서, 아니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선뜻 말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왔고,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어준 사람들이 함께하는 <허진이 프로젝트>에서는 멤버들이 서로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오늘 <인생 그래프> 활동에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런 마음으로 멤버들의 이야기를 성실히 듣고, 함께 웃고, 위로를 하려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멤버들에게 활동을 위해 도화지와 펜을 나눠주었다. 흰 도화지에 자신의 그간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지 어려워하는 멤버들에게 한 번 더 활동 방법을 설명했다.

“도화지 가운데 선을 긋고, 선 위쪽에는 인생에서 좋았던 일을, 아래쪽에는 좋지 않았던 일들을 적어주시면 됩니다.”

나의 말이 끝나자 모두 도화지 한 가운데에서부터 줄을 그었다. 그리고 어떤 멤버는 선 위에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아래쪽에는 우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그렸다. 바로 옆의 친구는 가운데 줄을 그어 나이를 나타내는 숫자를 적으며 칸을 나눴다. 다소 의미 없는 액션들을 취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어떤 이야기를 적어낼지, 그리고 얼마나 들려줘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다는 뜻일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멤버들의 도화지는 오르락내리락 선들과 크고 작은 글씨들로 채워졌다. 나는 가장 앞에 앉아 있는 친구부터 발표를 부탁했다. 그 멤버는 민망한 듯 일어서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다음 발표자는 표정으론 알 수 없었지만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열심히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모습에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발표자는 떨리는 목소리와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로 자신의 시간을 채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원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보호종료아동들에게는 그 기회조차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보육원이라는 공간, 최소 10명의 친구들과 한 명의 선생님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가정에선 나만을 위한 질문과 내 이야기로만 채워지는 순간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인생 그래프>를 통해 멤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멤버의 말투, 표정, 표현방법 등의 단서들로 알 수 없는 의미들을 찾아내기에 과부화가 걸릴 것 같던 찰나 어떤 한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대로도 충분하다!

그렇다. 이들의 이야기들과 고백들은 자립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향한 염려와 응원으로 전해지기에는 충분했다. 멤버들이 고백하는 어린 시절의 결핍과 슬프고 기뻤던 일들은 모두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의미가 있는 오늘, 그리고 지금이기에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순간, 귀한 본질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금 자세를 고쳤다. 편안한 자세로 말이다. 그저 멤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억해가면 되었다. 멤버들의 고백으로 시작될 앞으로의 강연을 기대하며 말이다.

글. 허진이 캠페이너

나눔사업국 1%나눔팀ㅣ서지원 간사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다(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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