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월] 아름다운 사치, 베를린

“우리에게도 안식월이 올까요?”
“안식월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아름다운재단에는 안식월 제도가 있다. 재단에서 일한 지 만 3년이 넘은 지난 가을 두 달의 안식월 휴가를 얻었다. 재단에 처음 입사하며 만난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동기가 자주 이야기하는 소재 중의 하나가 안식월이었다. 그렇게 얘기하던 안식월이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넘어 드디어 찾아왔다.

동네 자주 가던 카페 모습

동네 자주 가던 카페

떠남과 휴(休) 그리고 바람

매주 점심을 함께 먹으며 다가오는 안식월에 대해 준비를 하던 우리는 각자의 안식월 이름을 정해보기로 했다. 한 명은 안식월을 ‘두 달 학교’로 이름 붙이고 스스로를 교장선생님이라 명명하였다. 꽉 찬 프로그램으로 두 달을 보람차게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안식월 두 달 연구소'(사실 대신 지어준 이름이다. ^^)라는 이름과 함께 안식월 동안 자신만의 연구?를 열심히 하고 오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안식월, 주어진 두 달이라는 시간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사치’였다. 쉼이 있는 두 달 동안 난 낯선 곳으로 떠나 나의 시간을 갖기로 정했다. 입사 초기 동기들과 안식월의 바람을 이야기하며 자금 마련을 위해 각자의 여유대로 적금을 들자고 했었다. 그렇게 조금씩 모아온 적금으로 나의 시간을 위한 사치를 결정했다.

날씨 맑은 베를린 풍경

날씨 맑은 베를린 풍경

낯설지만 익숙한 일상

“딱히 할 일 없는 하루.
급한 것도 중요한 것도 없는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하루.
평소의 리듬대로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하루.”

두 달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들 무엇을 해보고 싶을까? 지인들을 만나면서 안식월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자신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행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짧은 휴가가 주어지면 해외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바쁜 현실을 떠나 휴식을 취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는 안식월이 재충전의 시간으로 다녀와서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쉼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쌓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안식월은 재충전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의 완전한 쉼이었다. 레이싱에서는 미캐닉을 통한 차량 정비가 다음 레이싱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더 큰 도약을 위한 잠시의 멈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이 끝없이 질주만 하는 레이싱과 같다면 많이 슬플 것 같다. 멈춤과 쉼이 함께 존재하는 그 자체도 우리 삶의 일부인데 말이다.

이방인으로 낯선 도시에 오래 머물러보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그 바람을 이루기에 충분했고 쉬기 위한 나만의 장소로 베를린을 택했다. 좋아하는 그림과 가고 싶었던 미술관이 있는 런던을 잠시 거쳐 베를린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이 도시의 매력에 빠져버렸고, 평범하고 할 일 없는 산책을 시작했다. 그렇게 사치한 것이다.

독일에 있으면서도 독일스럽지 않은 “베를린은 그냥 베를린이었다.” 이곳은 다양성과 자유로움, 조화와 새로운 시도, 넘치는 에너지 그리고 건강하고도 묘한 매력이 있는 도시다.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 마련 촉구 기후 파업을 하고 있는 포츠담광장 풍경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 마련 촉구 기후 파업을 하고 있는 포츠담광장 풍경

지구 반대편 그곳에서는 특별할 게 없는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식료품 값이 저렴하여 매일 마트에 갔고, 머릿속은 온통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해볼까?’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하고,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과 사과 파이를 먹으며 책을 보고, 갤러리 전시들을 찾아다니고, 개성 있는 동네 서점에 가고, 플리마켓에 가서 그릇을 사고, 어떤 날은 클래식 콘서트를 가거나 근처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그렇게 베를리너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베를린 공원, 서점, 호수, 필하모닉 콘서트홀

베를린 공원, 서점, 호수, 필하모닉 콘서트홀

따뜻한 안부와 특별한 인연

딱히 할 일 없는 소소한 하루들에는 가끔씩 전해오는 안부의 마음들이 함께 했다. 쉴 때는 건강해야 한다며 가기 전에 몸보신을 시켜준 친구부터 나의 안식월을 응원해주는 마음들, 낯선 도시에 대한 정보와 설명을 해준 세심한 안내자, 자신의 보금자리를 잠시 내게 내어준 인연들이 있어 별일 없었던 하루하루들이 시간이 지난 이제는 특별한 순간들로 기억되고 있다.

베를린에서 보내 온 동네 풍경

베를린에서 보내 온 동네 풍경

가끔 그곳의 기억을 떠올릴 때쯤이면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듯 그곳의 풍경 사진과 함께 안부 메시지가 온다. 유난히 짙었던 지난 가을의 사치는 즐거웠다. 미세먼지가 덜하고 맑은 하늘에 상쾌한 바람이 불 때면 그 가을의 풍경들이 오버랩되곤 한다.

우리는 매일 특별할 게 없는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저마다 다양한 빛깔의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그 일상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기억하고 충분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하루들로 우리의 일상들이 기억될 것이다.

지금 안식월을 떠나 있는 동기와 새로운 꿈을 향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은 동기도 각자의 짙은 계절들을 즐겁게 맞이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 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

경영사업국 기부자소통팀ㅣ정희은 간사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좋아할만한 다른 이야기

댓글 정책보기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