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어른] 인터뷰 06. ‘문영’의 자립

 

안녕하세요. 저는 열여덟 어른 ‘신선’입니다. 저는 이번에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로 참여하면서 다른 열여덟 어른들을 직접 만나 보았는데요. 열여덟 어른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이 자립하면서 겪었던 사회 편견부터 정책의 문제까지, 당사자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열여덟 어른을 아시나요? 
만 18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보호종료아동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열여덟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한 인터뷰이가 말했다. “인터뷰까지 할 수 있는 친구들은 살만 하니까 나온 거예요. 하지만 소수일 뿐이죠. 사회에 나와 어려움에 직면해도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어 음지로 들어가게 되는 친구들의 모습도 다뤘으면 좋겠어요!”

문영씨는 보육원을 도망치듯 나온 뒤 시설과의 연락을 거부했다. 주거지원과 교육비 지원도 시설 동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와 연락하는 친구들 중에는 시설과 연을 끊은 사람이 많다. 그녀와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보육원을 뛰쳐나오기까지

Q. 문영씨는 보육원을 도망치듯 나왔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해요.

홍문영: 태어나서부터 19살이 될 때까지 아동양육시설에서 생활했어요 어려서부터 육상 선수를 꿈꿨었는데 갑작스럽게 운동부가 해체되면서 한순간에 꿈을 잃어버리게 됐어요. 그 이후로 시설에서는 취업을 안 하고 있다고 눈치를 줬어요. 다른 친구들은 이미 취업해서 돈도 벌고 있는데 너는 왜 아직도 취업을 못하고 있냐며 대놓고 비교를 하면서요. 시설에 있는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결국 퇴소 절차도 밟지 않고 무작정 뛰쳐나왔어요. 19년이나 살았는데 나올 때 짐이 캐리어에 반도 안 담기더라고요.

Q. 퇴소 지원은 못 받은 건가요?

홍문영: 퇴소를 몇 달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시설에서 퇴소 처리를 해준 것 같아요.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디딤씨앗 지원금(만 18세 아동이 매달 최대 4만원을 저축하면 국가지원금으로 최대 4만원까지 지원해주는 제도) 300만원은 다행히 받을 수 있었고요. 보육원을 나와서는 아무 공장이나 찾아가서 경제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적응하기 힘들었던 사회생활

Q. 신선: 회사 생활은 어땠나요?

홍문영: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시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회사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었어요.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항상 혼자였어요. 회사생활에 적응을 못하다보니 이직과 이사를 반복했어요. 돈도 떨어져 갔고, 밥도 잘 챙겨먹지 않았어요. 게다가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자주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회사에서도 너무 자주 쓰러지는 저한테 일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해서 결국 일을 그만 두기도 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막막했어요. 뒷바라지 해줄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자주 쓰러지기까지 하니 제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거든요. 하루는 출퇴근 시간 사람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 지하철에서 1시간가량을 울면서 집에 오기도 했어요.

Q.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은 없었나요?

홍문영: 주변에 딱히 도움을 청할 어른들은 없었어요. 그래도 힘이 들 때 그 당시에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했었는데 그마저도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고 난 뒤로는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었어요. 남자친구의 부모님께서는 “부모님은 뭐하시나?, 고향은 어디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등의 질문을 하셨어요. 저는 그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어요 .“부모님은 안 계세요, 그래서 보육원에서 자랐고요, 지금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묻더라고요. “그럼 할머니나 이모도 없니?” 제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는데도 너무 슬프고 답답하더라고요. 결국 그날 남자친구의 부모님의 요청으로 헤어지게 됐어요.

이후로는 주변에서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면 거짓말을 했어요. ‘엄마는 가정주부고, 아버지는 마트에서 일하시고 있다. 혼자 산 지 오래돼서 부모님과도 연락은 자주 하지 않는다’는 스토리 만들어서 둘러댔어요. 그러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게 된 이모님이 계신데 그 분에게는 제 사정을 얘기 하게 됐어요. 저를 유독 좋아해주고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게 느껴지니까 그분에게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 배경에 대해 물으셨을 때 “나 엄마 없어”라고 했더니, 거짓말 하지 말라며, 아버지나 삼촌은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렇게 제가 보육원에서 지냈다는 걸 털어놨어요. 이모님은 저에게 “괜찮아. 엄마 없는 게 흠이 아니니까 기죽지 말아”라고 하셨어요. 제가 미용사 자격증 준비를 하면서 필기를 5번이나 떨어졌거든요. 그럴 때마다 이모께서는 매번 응원해주고, 밥 잘 챙겨먹으라고 맛있는 음식들을 해주셨어요.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마운 분이에요.

Q. 미용시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미용은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홍문영: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다 시설 동기들을 통해 뒤늦게 미용기술을 배웠다는 얘기를 접하게 됐고, 그 길로 미용학원에 접수하고 미용 일을 배우게 됐어요. 미용학원은 가발이나 기구와 같은 재료비용도 많이 들고, 주거비도 부담해야 하니 음식집 아르바이트도 병행했어요.

Q. 문영씨는 시설 동기들과 연락을 하면서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것 같아요.

홍문영: 명절이나, 연말에 갈 곳이 없잖아요. 친구들은 그럴 때 모여서 같이 여행도 가고 밥도 먹으면서 어렸을 때 얘기나 밀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 같은 존재예요. 지금은 각자 삶이 바빠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언제나 응원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줘요.

지금 저희 집에서 같이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한때 갑상선이 심각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친구가 병원비용이 없어 오랫동안 혼자서만 참아왔더라고요. 건강하던 친구가 삐쩍 말라서 너무 힘들어하기에 시설 동기들과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다행히 동사무소와 병원에 연결이 돼 수술을 마칠 수 있었고요. 그 친구도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공장에 취직을 했다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퇴사하면서 5년 정도 방황을 했어요. 그 모습이 마치 제 모습과 비슷해서 저희 집에서 몸이 건강해질 때까지 같이 지내자고 했어요, 지금은 많이 건강해졌고요.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꿈꾸며

Q. 마지막으로, 보육원을 나설 때 정말 필요했던 지원들이 뭐가 있었나요? 어떤 지원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홍문영: 막 사회에 나왔을 20살, 21살이 가장 힘들었어요.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버텨야만 했기 때문에요. 지금 와서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니까 그 시절에 왜 나에게 맞지 않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나 싶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삶의 모습이 정말 다양한데.

시설친구들은 대부분이 공장으로 취직하는 편이었어요.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면,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이라도 벌라고 하기 때문에요. 퇴소 후 돈 걱정 하지 말라는 목적으로 공장에 내몰았던 것 같아요. 그 시절 시설 안에서는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앞으로 시설을 떠나는 후배들에게는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들에게만은 다양한 삶의 모습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선한 시선. 열여덟 어른 인터뷰 후 당사자로서 느낀 생각을 공유합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학생 시절, 주변을 둘러봤을 때 선배들의 삶은 공장이나, 사회복지사, 요리사 정도로 정말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의 꿈도 요리사였지만 요리를 해보고 난 후 나의 적성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범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주변 친구들 대부분 부모님이 교사였고,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사를 꿈꾸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국어교사 또한 나의 적성이 아니라는 걸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후, 꿈을 찾지 못해 방황을 하던 중 나는 아동자립정책과 관련해 보건복지부 담당자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불편한 조항에 대해 고민하고, 수정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회복지사의 매력을 맛보게 되었다. 그때 처음 아동복지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가 26살이었다.

내가 진로를 고민할 때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보육원에서 공장으로 취업을 강요했다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설선생님들에게 꿈을 쫓으라는 말보다 사회에 나갔을 때 당장 먹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기에, 기술을 배워 안정적으로 취업하기를 바랐던 거였을 테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을 업으로 삼을 꿈에 대해 고민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후회한다면 그들의 삶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립 자체도 버거워 생존투쟁을 하느라 자기 꿈을 이루지도 못하는 친구들이 존재한다.

앞으로의 후배들은 더 다양한 직업 선택지 안에서 자신의 꿈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우리와 같이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from.신선

글ㅣ사진  신선 (열여덟 어른 캠페인 캠페이너) 

나눔사업국 1%나눔팀ㅣ서지원 간사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다(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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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응답

  1. 차인철 댓글:

    힘내세요 저도 도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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