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하고 싶었던, 그래서 ‘영웅’이 된 김군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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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자 할머니의 90세 생신을 축하드렸던 날

김군자 할머니의 90세 생신을 축하드렸던 날

김군자 할머니! 저 다정이 엄마예요.

할머니를 뵈어온 지 만 11년이 되었지만 저를 정확하게 기억해 주신 것은 한 5년 전부터였지요.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면서 제 이름을 말씀드리면 기억을 잘 못하셨어요. 할머니께선 “여기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 이름을 기억 못해. 미안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할머니, 저는 매번 방문하는 아름다운재단 간사 중에 ’너무하잖아‘ 랑 ’제주도 간 친구‘랑 같이 다녔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을 거쳐 간 퇴사한 간사들을 그렇게 별명이나 특징으로 기억하면서 오랫동안 그리워하셨지만 정작 이름은 기억 못하셨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나눔의 집’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죠. 학생부터 정치인, 공무원. 해외에서도 많은 분들이 오고가셨고, 정기적으로 자원봉사 다니시는 분들도 계셨고, 게다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여러 비영리 단체들도 오고가니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라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정작 이름을 알고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관계… ‘할머니들의 삶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외로운 섬 같은 삶이구나’ 싶었어요.

20141219_아름다운재단 김현아 국장과 함께 한 김군자 할머

2014년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외로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 저희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이후부터 “이름보다는 ‘다정이 엄마’라고 부르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금방 기억을 하셨어요. 그 이후도 제 이름을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라는 이름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할머니와 진짜 ‘관계’를 맺은 것 같아 기쁘기도 했어요.

아름다운재단의 다른 간사에게도 “결혼은 했니? 아이는 몇이니? 셋은 낳아야지” 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다들 “애 키우기 힘들어서 더 못 낳아요” 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혼자는 너무 외롭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어르신들이 통상 하는 말씀이지만,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마음이 쓸쓸했어요. 할머니가 얼마나 가족을 이루고 싶어 했는지 잘 알기에, 그 말 한 마디에 외로움이 더욱 묻어나 보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동료들에게 조심히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장례를 모두 마치고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꿈 속 같네요. 할머니는 해방 후의 삶에서도 외로움과 가난의 고통이 가득했다는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지요.

식당에서도 일하고 장사도 하고, 이름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사장의 입주 가정부로도 일했다고 하셨어요. 일하다 팔이 부러져 깁스를 했는데도 자동차 세차를 시켜서 그 집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저희도 “그 사장 진짜 나쁜 사람이네” 하며 분통을 터뜨렸었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물건 장사도 해보았는데, 전 재산을 털어 산 물건을 단속에 빼앗겼을 때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할머니는 “너무나 기구한 팔자라 7번의 자살 시도마저도 실패하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셨어요. 인생이 너무 기구하여 ‘왜 나만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가‘ 도통하고 싶어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신 얘기도 하셨지요. 할머니가 담담히 들려주시던 살아온 이야기가 저에게는 너무 아프고 외로웠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답니다.

매번 찾아뵐 때마다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까’ 라고 하셨는데, 지난 5월 생신 때는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셨어요.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기구할까 했는데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니 기쁘고 이제는 미련도 후회도 없어. 인생이 별게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여러분은 재미있게 살아”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할머니, 매번 깨달음을 얻고자 하셨다면서 이제 보니 이미 도통하셨네요”라고 말씀드렸죠.

2016년 추석을 맞아 장학생들을 만난 김군자 할머니.

2016년 추석, 장학생들을 만난 김군자 할머니

평범한 할머니가 되고 싶었던 할머니, 잊지 않겠습니다

김군자 할머니! 할머니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셨어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께서 ‘위안부 피해자’로 증언하신 것을 보고 용감하다고 존경스럽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저는 ‘할머니께서 정말 원하신 걸까’ 하는 질문을 속으로 한 적이 있어요. 할머니께서 위안부 피해신고를 하실 때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몸도 불편하시고 생계가 어려워 주저하시다가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신고하셨다고 들었어요.

할머니가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 참석하여 위안부 피해자로서 증언한 사건은 위안부 피해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용기에 존경의 박수를 보냈었죠. 하지만 전 할머니가 미국까지 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가 먼저 생각이 났어요.

할머니는 갑상선 기능 이상을 오래 앓으셔서 땀을 많이 흘리셨고 에어컨 바람을 굉장히 힘들어 하셨죠. 고령에 장시간 비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런 것부터 생각났어요. 나눔의 집 할머니들께 좋은 곳 구경 시켜드린다고 여러 기관에서 초청하여 여행 보내드릴 때도 할머니는 에어컨 바람 쐬면서 가야 하는 여행은 거부하셨던 것을 여러 번 들었거든요.

나 좋자고 하는 여행은 거절하시면서도, 그토록 고통스런 경험을 증언하러 가는 길에 용기를 내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진짜로 할머니가 바라셨던 것은 아주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보통의 아주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같이 외로운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진짜 할머니가 되어주시고자 기부를 하시고 장학금을 주셨지요.

그 바람대로 장학생들에게 할머니는 진짜로 ‘할머니’셨어요.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장학생은 “가장 절박했던 때에 장학금을 주신 것도 감사하지만, 생전에 찾아뵈었을 때 잡아주시던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가장 생각난다”고 했어요.

꽃을 소중히 든 김군자할머니의 손

꽃을 소중히 든 김군자 할머니의 손

 

고통스러운 삶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고통을 가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신 할머니야말로 우리 모두의 할머니이자 진짜 영웅이에요. 평생 동안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것 잊지 않고 살아갈게요.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함께 살아갈게요.

김군자 할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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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자 할머니

나눔사업국ㅣ김현아 국장

아직은 모금전문가라 말하기 부끄럽지만 언젠가는 지식과 현장 전문성을 겸비한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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