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한 끼 밥 같은 집을 나누다 – 이연복 셰프 인터뷰

든든한 한 끼 밥 같은 집을 나누다 - 이연복 셰프 인터뷰

이연복 셰프

이연복 셰프

 

 ‘세상에 하찮은 음식은 없다’는 스타 셰프 이연복. 그의 요리는 정직하다. 장삿속 눈속임 따윈 없다. 입안에 들어가는 건 모두 귀하기 때문이다. 유명세를 타거나 말거나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음식을 만든다. 틀에 갇혀 딱 부러지기보다는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보약이기에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가 내온 짬뽕 한 그릇, 값싼 군만두만으로도 배가 든든한 이유다. ‘그래, 나만의 호흡으로 살아보자’ 스스로를 다독이게 만든다. 위로와 비슷하다. 그렇게 한 끼 음식이 위로가 되고 또 희망이 되기까지 40년. 물론 요리를 시작할 때부터 천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요리는 선택지 없는 어린 이연복의 유일한 출구였다. 

“외가, 친가 모두 화교 집안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중국집에서 아버지가 주방장으로 일할 당시엔 꽤 잘 살았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었죠. 명동에 있는 한국한성화교소학교에 다니던 때였는데 등록금이 꽤 비쌌거든요. 부모님도 3남 2녀를 가르치려니 허리가 휘셨을 거예요. 한 놈 등록금 내면 다른 한 놈 등록금이 밀리곤 했죠. 그래서 6학년 2학기가 시작될 즈음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아버님 지인이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일했죠.”

등록금을 못 내면 하루 종일 칠판 옆에 서서 수업을 받았다. 별일 아닌 듯 너스레를 떨어도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모른다. 수차례 반복되는 수모는 결국 그를 학교 밖으로 몰아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벌을 서야 하는 학교가 좋을 리 없었다. 차라리 돈을 벌겠다고 호기롭게 나섰지만 세상은 냉혹했다. 자전거도 없이 걸어서 중국요리를 배달하며 받은 첫 월급은 3천 원이었다. 선배들은 어린 그를 괴롭혔고, 사장은 장사가 끝나면 밖에서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은 집을 그리워했다. 배가 고파 사장의 바나나를 훔쳐 먹다 혼이 난 동료, 밥을 구걸하러 들어왔다 일하게 된 동료… 누군들 안타깝지 않은 사람이 없던 시절, 강해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2층 숙소에서 뛰어내린 건 자유롭고 싶어서였다. 가난해도 좋으니 자신을 사람대우하는 ‘집’에 가고 싶었다. 

시련을 넘어 사람을 만나다

‘주변 사람이 기뻐야 나도 기쁘다’ 그 연장선에서 이연복 셰프의 나눔이 시작됐다.

‘주변 사람이 기뻐야 나도 기쁘다’ 그 연장선에서 이연복 셰프의 나눔이 시작됐다.

 

“두 번째 가게에서 주방 일을 겸했는데 선배들 어깨너머로 음식 만드는 것을 배웠어요. 뭐가 몇 그램, 몇 스푼 이런 걸 누가 알려주나요. 감과 경험, 눈으로 보고 배우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 눈썰미 있게 보고 머리로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될 때 만들곤 했어요.”

샤보이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 서울 퇴계로 ‘홍보석’ 등을 거치며 실력이 쌓였다. 스무 살 무렵엔 조리사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최연소 대만 대사관 주방장’ 타이틀을 얻었다. 이제껏 만들 기회가 없던 요리도 맘껏 해볼 수 있었다. 요리 솜씨는 일취월장했다. 매번 다른 요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요리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 번 내놓았던 것을 노트에 적고 다음 날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서 수정하기를 수십 차례. 그렇게 자신만의 레시피가 완성될 무렵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대사관 다닐 때 축농증이 심해서 수술 받았는데 이후로 냄새를 맡지 못해요. 양파도 사과처럼 느껴지고 행주가 불에 타도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죠. 낙담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죠. 한데 절망보단 이제까지 내 실력을 믿어보자 싶더라고요. 훈련하니 미각이 더 예민해지고 질감으로 맛을 더 섬세하게 구분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빠삭한 것, 아삭한 것, 쫄깃쫄깃한 게 좋아요. 회는 쫄깃하면서 담백함이 돌아서 좋아요. 이젠 식감만으로도 맛을 구분하죠.”

이젠 예약 없인 들를 수 없는 ‘목란’을 차리기까지 숱한 고비가 있었다. 낯선 일본 땅에서 10년을 일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입지를 굳히기 쉽지 않았다. 늘 마음 한켠 자리했던 중풍으로 누워계시던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어린 아이 둘을 맡겨두고 아내와 둘이 고군분투하며 배운 건 ‘주변 사람이 기뻐야 나도 기쁘다’였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나눔이 시작됐다. 

‘집에 가고 싶다’ 캠페인의 의미

아름다운재단 주거지원캠페인 <집에 가고싶다> 홈페이지

아름다운재단 주거지원캠페인 <집에 가고싶다> 홈페이지 ;

 

“사실 요식업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자원봉사활동은 시간과 금전적인 문제로 쉽지 않아요, 힘들죠. 한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벌면, 좀 더 좋아지면 효도해야지, 생각하지만 부모님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그래서 미루지 않기로 했어요.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로 아름다운재단의 ‘집에 가고 싶다’ 캠페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11월 2일 주거지원사업을 위한 아름다운재단 후원의 밤 행사 재능기부도 두 말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죠.”

이제까지 진행해 온 소년소녀가정 주거비 지원사업과 어르신 난방비 지원사업과 더불어, 대표적 주거취약계층인 아동양육시설 퇴소아동의 주거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아름다운재단의 ‘집에 가고 싶다’ 캠페인은 이연복 셰프에게 남다르다. 시설을 나와 집이라는 장벽을 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는 퇴소아동이 40여 년 전의 자신과 닮아서다. 돈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 집이 없어 노숙하는 비참한 순간은 자신에게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주거지원캠페인 <집에 가고싶다> 참여하기 

“자원이 없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더 가요. 물고기 주는 것보다 잡는 법을 가르치랬다고 커다란 식당을 차려서 요리를 배우고 싶은 자원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면 어떨까 궁리도 해요. 고든 램지가 그랬듯이요.”

평범한 음식도 세월을 견디고 땀이 더해지면 맛있는 한 그릇을 넘어 삶이 되더라는 이연복 셰프. 그는 기댈 곳 없는 이들이 온기 있는 집에 안착해, 그 기운을 뒷심 삼아 제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고대한다. 그리하여 제 주변의 또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도울 수 있기를…. 아름다운재단의 ‘집에 가고 싶다’ 캠페인은 이연복 셰프의 그러한 바람을 이루는 첫 단추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수용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  

글 우승연 | 사진 임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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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사업국 기금개발팀ㅣ서지원 간사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다(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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